이달의 작가: 청소년을 가장 현실감 있게 그려 내는 청소년문학의 ‘완소 작가’ 박선희 작가

‘작가의 말’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아직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지 않은 십 대 여자아이들의 사랑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사랑에는 반드시 그 대상이 있으니 남자아이들까지 포함시켜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인류의 영원한 주제들 중 하나는 ‘사랑’인데, 십 대라고 해서 그 주제를 벗어나 있을 리 없으니까요. 아니, 어쩌면 가장 강력하고 순수한 형태의 사랑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십 대일 수도 있지요. 정신적·신체적 성장이 가파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감성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예민해지고 부풀어 오르는 때잖아요. 성 에너지 역시 그 때 가장 왕성하게 분출되고요. 동서양의 고전 명작에서 그려지는 사랑의 주인공들이 십 대였던 것만 보아도 하이틴들의 사랑은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성춘향과 이몽룡, 베르테르와 롯테. 이들의 사랑을 과연 철없는 아이들의 불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요?

십 대의 사랑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면서 그들의 사랑이 상당히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다는 것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알록달록 여러 색깔의 프리즘을 만들죠. 짝사랑은 기본이고,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사랑, 스타를 향한 열광적인 사랑, 우정에 밀려 뒷걸음질치는 사랑, 동성애, 사랑인지 아닌지 헛갈리는 아리송한 사랑……. 『줄리엣 클럽』에서는 이렇듯 다양한 빛깔의 사랑과 함께 과외 선생과 벌이는 깜찍한 계약 연애까지 등장합니다.
십 대의 사랑 이야기가 창작의 욕구를 더욱 자극한 것은 그들 사랑의 순수함과 명쾌함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설익고 어설프긴 하지만 어떠한 가식도 계산도 이기심도 없이 누군가를 고스란히 사랑하고, 사랑 후의 까슬까슬한 쓰라림까지도 용기 있게 받아들이는 쿨함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죠.

소설 속 인물은 현실감이 있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인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습니다. 현실감은 ‘공감’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니까요.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소설은 결국 독자들과 소통할 수 없는 소설이라고 보거든요.
어떤 인물이든 사물이든 그것의 성격과 속성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표현하는 데 ‘관찰’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관심과 호기심, 애정으로부터 시작되는 탐색이죠.

적어도 저는 청소년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들에 대한 애정 어린 호기심 없이 청소년 소설을 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대상이 악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조차도 말이죠. 밝은 색이든 어두운 색이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아야 그것만큼 생생한 색깔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소가 떠올려지든 가슴이 얼어붙든, 들여다본다는 것은 애정을 담고 있다는 뜻이고요.
몇 년간 십 대 아이들을 꾸준히 만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소설계의 새로운 흐름에 편승하거나 독자층을 넓히는 차원이 아니라, 십 대들의 이야기가 머릿속, 가슴속에서 들끓고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으니까요. 내가 잘 아는 현재적인 그들이 내 안에 살고 있고 내 손끝을 통해 생생한 모습으로 달려 나오는 것을 소설을 쓰는 동안 줄곧 느낍니다.

파격적으로 다가온다는 반응 자체에서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을 어떻게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통제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십 대의 성 행위는 죄악이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신은 인간을 왜 그 시기에 성 에너지가 가장 왕성하게 분출하도록 만드셨을까요? 문제는 우리의 성교육이 폭력적이고 자연성을 거스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몸은 어른이 다 되었는데 성적 욕구를 억압하도록 강요받으니 성 관계가 비행화되고 부작용을 낳는 거죠.
현대 사회의 특성상 청소년기의 성 행위가 자칫 골치 아픈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 행위 자체를 죄악시하고 금욕을 곧 도덕적인 것으로 왜곡하는 일이야말로 더 많은 불행을 낳는 원인이 됩니다. 성(性)에 대한 개념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더럽고 감추어야 할 것으로 형성되는 불행까지 합해서요.
『줄리엣 클럽』의 연두가 한 말처럼 자기 몸을 자율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의식이 오히려 성에 대한 나름의 태도를 가지고 자기 몸에 책임을 지는 큰 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성 교육도 그런 쪽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 같고요.

사실 네 아이에 대한 마음이 하나같이 애틋해 누구 하나를 꼽기가 힘드네요. 깨물면 모두 아픈 열 손가락처럼요. 굳이 꼽아 본다면 윰? 한마디로 ‘오지랖’ 캐릭터인데, 남의 일에 습관적으로 참견하길 좋아하는 오지랖이 아니라 친구들의 일을 마치 자기 일처럼 느끼는 진심 가득한 오지랖입니다. 게다가 의리파죠. 밋밋한 가슴에 키만 훌쩍 크고 외모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어요. 개인적으로 중성적인 여자들을 좋아해서인지, 내가 그 또래라면 윰을 친구로 사귀어 보고 싶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애착이 간다기보다 마음 쓰이는 캐릭터라면 연두예요. 가장 위태롭고 아픔이 큰 아이라선지……. 힘 있는 사람보다 힘없는 사람에게, 유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보다 불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더 마음을 쓰게 되는 것과 비슷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청소년 시절은 인적이 드문 골목 한 귀퉁이에서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고양이 같았다고 할까요. 시니컬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했고,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가 싫었어요. 학교생활에도 시큰둥했죠. 집에서는 남의 일엔 관심도 없는 아이로 보였고, 학교에선 조용하긴 하나 선생님에게 할 말 다 하는 반골로 인식되었어요. 많지는 않았지만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도 ‘범생이’와는 거리가 먼 아이들이었지요. 심야 라디오 음악 프로를 들었고, 두 시간 넘게 시내를 돌아 종점으로 돌아오는 버스 여행을 즐겼습니다. 지금까지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는 내 인생의 가장 진정했던 사랑, 짝사랑도 그때 해 보았고요.

아이들에게 한 우물을 파라는 얘기를 해 본 적이 없어요. 열심히 우물을 파다가 ‘여기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확실해지면 다른 우물을 파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물론 몇 번이고 현재의 상황을 점검하면서 신중하게 선택을 해야겠지만요.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사람의 자기 합리화로 여길 수도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유랑하듯 살아온 시간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오히려 소설을 쓰는 저에겐 큰 도움이 되고 있기도 하죠. 다양한 경험이 인간과 세상에 대해 상대적으로 다양한 관점을 갖게 했을 테니까요. 한 가지로 시야가 고착되지 않는다는 건 글을 쓰는 사람에겐 선물과 같은 일이라고 봅니다. 또 여러 분야에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다 보니 인간에 대한 이해도 그만큼 확장되었다고 믿고요. 주변의 생각보다는 저 자신의 생각을 믿고 자유롭게 모험을 해 온 것이 소설가로서의 저에겐 분명 플러스가 되고 있습니다.

내년 초에 새 작품이 출간될 예정이에요. 30년 된 이층집이 도미노처럼 이곳저곳 차례로 망가져 가는 것을 알레고리로 하여 십 대 소녀의 발랄한 화법으로 21세기의 새로운 가족 형태를 보여 주는 작품인데요, ‘가족 해체’가 아닌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마술을 배우는 아이인데 마술로써 세상을 알아 가는 모습도 흥미로울 겁니다.
그리고 지금 준비 중인 소설이 또 하나 있어요.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를 소재로, 십 대의 충동성과 부적응을 내 안에 살고 있는 ‘그놈’이라는 존재와의 투쟁-타협 관계로 풀어 나갈 계획입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 이 정도로 하지요. 무엇을 쓰든, 튼튼하고 정교한 집을 짓는 꿀벌처럼 다른 생각 없이 쓰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