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심리 여행: 일곱 살 아들이 아직 한글을 깨치지 못해서 걱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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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 두 명이 그림책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연구소에 찾아왔습니다. 아이를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는 관계인지라 따로 오면 좋을 텐데 싶었지만 꼭 함께 오겠다고 하더군요. 제가 정보를 공평하게 제공하지 않을 거라는 불신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일이 벌어졌습니다. A씨의 아이가 책꽂이에 꽂혀 있는 그림책을 꺼내 펼치더니 소리 내어 유창하게 읽는 겁니다. B씨의 아이는 부러운 듯 바라보다 다른 곳으로 가버리더군요. A씨는 아이가 32개월에 한글을 뗐는데 특별히 가르친 게 없는데도, 스스로 한글을 떼서 무척 신기하고 기특하다며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자 B씨는 한글을 빨리 뗀 아이들이 공부에 일찍 싫증을 낸다는 근거 없는 얘기를 하며 A씨의 기분 좋은 자랑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이처럼 유아기 자녀를 둔 엄마들에게 아이의 한글 습득은 곧잘 경쟁의 잣대가 되는 듯합니다. ‘누구는 몇 개월에 한글을 뗐네, 또 누구는 쓰기까지 하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상할 뿐더러 아직까지 글자를 읽지 못하는 내 아이가 걱정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저는 한글 습득에 관한 정확치 않은 정보를 공유하며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엄마들이 오히려 걱정입니다. 한글 습득 과정을 정확하게 알면 다른 아이와 내 아이를 비교하지 않고 한결 마음이 느긋해질 테니까요.
이달에는 일곱 살 난 아이가 한글을 깨치지 못해 엄마와 함께 상담 받으러 온 사례를 소개하며 한글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한글을 깨치지 못한 내 아이, 혹시 지능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한솔이(가명) 엄마는 일곱 살 아들이 아직까지 한글을 깨치지 못한 것을 무척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상담을 받아야겠다고 할 때마다 남편은 때가 되면 저절로 깨칠 텐데 뭘 그렇게 조급해 하느냐며 핀잔을 놓았다고 합니다. 박사 학위를 가진 남편이 초등학교 입학해서 한글을 배웠다는 이야기에 위안을 얻다가도 엄마들 모임에만 갔다 오면 불안감이 생긴다고 하더군요. 그때랑 지금은 시대가 다른데 남편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지요.
엄마는 한솔이의 지능을 의심했습니다. 집에서 열심히 한글을 가르치는데도 발전이 없으니까 지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게 엄마의 말이었습니다. “말 잘하고 눈치껏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또래 아이들이 갖는 호기심도 있으며 친구들과도 잘 어울려 노는데 굳이 지능 검사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라고 한솔이의 건강한 발달 상태를 얘기해 주었더니 경직되어 있던 엄마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한솔이는 유창하게 읽지 못할 뿐이지 그림책을 보면서 아는 단어가 나오면 반가워하고 쓸 줄 아는 단어도 꽤 많았습니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그림책들을 훑어보며 쉬운 단어로 만들어진 제목은 곧잘 읽었고요. 한솔이의 한글 실력은 요즘 아이들이 워낙 빨리 한글을 깨치는 경향이 있어서 결코 수준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문제가 될 만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의 한글 교육 방식을 점검한 다음, 그림책을 활용하여 재미있게 한글 교육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식으로 상담을 진행했습니다.

글자 그림책으로 한글 교육을 시작해 보세요
그동안 엄마가 아들에게 한글을 어떻게 교육해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한솔이 엄마는 주로 한글 학습지를 이용했다고 하여 두 번째 만남에 그 학습지들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한글 학습지는 자음과 모음을 따라 쓰는 것에서 시작해 글자와 단어를 익히고, 문장 이해까지 확장되도록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정해진 진도를 밟아 가며 매일 학습지를 따라 읽고, 하루에 다섯 페이지씩 단어를 따라 쓰게 하여 한글을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이런 한글 교육 방식은 그야말로 아이를 질리게 하는데 말이지요.
한솔이 엄마에게 이론 교육 차원에서 유아의 한글 습득 원리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한글을 처음 배울 때 낱말을 자모의 조합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낱말 자체를 한 덩어리로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한글 교육을 시작할 때는 문장에서 단어, 글자, 자모 순서로 다루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예전에는 자음과 모음을 먼저 배운 다음,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글자가 만들어지고 글자와 글자가 모여 단어가 만들어지는 원리로 한글을 익혔습니다. 저 또한 이런 방식으로 한글을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반대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아이에게 기차 관련 그림책을 여러 번 읽어 주면 ‘기차’라는 글자를 읽고, 다른 문장 속에서도 곧잘 ‘기차’라는 낱말을 찾아내지만, ‘감기’라는 낱말의 ‘기’는 읽지 못합니다. 이는 아이들이 문장 → 단어 → 글자 → 자음과 모음 순으로 글자를 익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기차’라는 단어를 가르친다고 한다면, 먼저 기차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기차가 나오는 『기차 ㄱㄴㄷ』(비룡소), 『창문뱀』(청솔) 같은 그림책 또는 그림 카드, 신문, 잡지 등에 있는 기차를 보여 줍니다. 그다음에 ‘기차’라는 낱말을 그림책에서 찾게 하고, 낱말에 익숙해지면 다른 글에서 ‘기’자와 ‘차’자를 찾아 보여 주며 각각의 글자를 가르치는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야 ‘ㄱ’과 ‘ㅣ’가 합쳐져 ‘기’라는 글자가, ‘ㅊ’와 ‘ㅏ’가 합쳐져 ‘차’자가 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이런 원리로 한글을 교육할 때는 ‘글자 그림책’ 또는 ‘ㄱㄴㄷ 그림책’(한글 자음과 모음의 순서에 따라 단어나 글을 나열하여 유아들이 글자를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림책)을 활용하면 좋다고 한솔이 엄마에게 조언했습니다. 흥미 있는 스토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글자 그림책으로는 『기차 ㄱㄴㄷ』(비룡소) 외에도 『하마의 가나다』(비룡소), 『수수께끼 ㄱㄴㄷ(비룡소)』, 『개구쟁이 ㄱㄴㄷ』(사계절), 『생각하는 ㄱㄴㄷ』(논장), 『냠냠 한글 가나다』(고인돌)등이 있습니다.

시리즈 비룡소 아기 그림책 50 | 글, 그림 박은영
연령 2~5세 | 출판사 비룡소 | 출간일 2007년 1월 19일 | 정가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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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ㄱㄴㄷ(보드북) (보기) 판매가 10,800 (정가 12,000원) 장바구니 바로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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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2~5세 | 출판사 비룡소 | 출간일 2004년 8월 30일 | 정가 8,000원
이 그림책들은 글자 그림책의 가치를 살려 손가락으로 텍스트를 짚어 가며 읽어 주는 동시에 낱말에 해당하는 그림을 아이와 함께 찾아보는 식으로 활용하면 효과적입니다. 한솔이 엄마에게 『기차 ㄱㄴㄷ』을 활용하여 한글 교육에 접근하는 방법을 직접 보여 주었습니다.
한솔이가 그림책을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앉게 한 다음 표지 그림과 제목에 관한 이야기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림책 제목에 ‘기차’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데 기차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지, 기차라는 글자를 보니까 어떤 느낌이 드는지 등에 대해서요. 받침이 없어서 아주 쉬운 글자라는 것과 기차하면 ‘길다’와 ‘여행’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고 하더군요. 두 단어를 떠올린 한솔이의 능력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갔습니다. 그림책 속에 나오는 기차도 여행을 떠났는데 어떤 여행을 했는지 그림책을 펼쳐 보자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읽어 줄까? 아니면 한솔이가 읽을까?” 하고 읽기 방식을 선택하게 했더니 읽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스럽게 읽어 준 다음, 두 번째에는 텍스트 아래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다시 한 번 읽어 주었지요. 한글 공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조심했습니다.
책 읽어 주기를 마치고 나서 한솔이 엄마에게 한글 교육이라는 목적을 지나치게 의식하느라 스토리를 무시한 채 발음과 띄어쓰기를 정확히 지키는 데 집중해서 읽어 줄 경우 낭독이 자칫 딱딱해질 수 있으므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읽어 주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습니다.
ㄱㄴㄷ

그림책을 자주 읽어 주는 것도 훌륭한 한글 교육이에요
이어진 상담에서도 한솔이 엄마의 잘못된 한글 교육 방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엄마랑 하는 한글 공부가 재미있는지 물었더니 아이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군요. 엄마가 그림책을 읽어 주면 좋겠는데 자꾸 따라 읽기를 시키고, “소리 내서 읽어 봐.” 하고는 잘못 읽으면 “다시! 틀렸잖아.”라며 야단쳤다고 합니다. 긴장을 해서 아는 글자도 자꾸 틀리게 읽게 된다며 속상해했습니다.
한솔이는 집에서 하는 한글 공부는 싫고 짜증나지만, 유치원에서 하는 한글 공부는 재미있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친절하고 한솔이가 몰라도 야단치지 않는 데다 재미있게 그림책을 읽어 줘서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한솔이는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림책을 하루에 한 권밖에 읽어 주지 않아서 더 많이 읽어 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림책을 읽기 연습 도구로 삼는 것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아이의 해독 능력이 자동화될 때까지 그림책을 소리 내어 읽게 하는 방법은 물론 필요합니다. 하지만 잘못 읽은 부분을 일일이 지적해 바로잡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이는 그림책 읽는 행위를 즐기지 못하고 시험 보는 것처럼 심적인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나중에는 엄마 앞에서는 그림책을 소리 내어 읽지 않으려고 하겠지요.
한솔이 엄마에게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이에게 그림책을 많이 읽어 줄 것을 조언했습니다. 특히 한글을 완전히 깨치지 못한 한솔이한테 그림책 한 권을 통째로 읽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엄마가 먼저 그림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준 다음, 다시 한 번 그림책을 함께 보면서 한솔이가 아는 글자를 찾아보게 하거나 좋아하는 그림책을 가져오게 해서 엄마랑 번갈아 가며 한 페이지씩 소리 내어 읽는 방법을 권했습니다.
한글을 배우는 유아들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절망감을 맛보아서는 안 됩니다. 글자 또는 단어 몇 개라도 읽을 수 있다는 기쁨을 느끼고 성취감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아이는 자신감을 갖게 되니까요. 억지로 읽고 쓰게 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문장을 많이 보여 주고 들려줘야 한글을 깨치는 데 도움이 되므로 그림책을 보여 줄 때는 이 점을 염두에 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림책으로 놀이하듯 한글을 만나게 해요
놀이처럼 하는 한글 교육을 하면 좋다는 조언을 들은 한솔이 엄마는 “그렇게 하면 체계가 없지 않나요?”라며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또 자신이 창의적이거나 활동적인 스타일이 아니어서 차분하고 정적인 공부 방법이 좋다는 말을 덧붙이더군요. 학습지로 한글 교육을 하면 진도만 따라 가면 되니까 편하고, 한 권을 떼고 나면 한글 실력이 그만큼 성장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방문 학습지 선생님 힘을 빌리지 않고 집에서 혼자 한글 교육을 해 왔다고 했습니다.
더 좋은 방법을 찾았을 때는 지금껏 고수해 온 방법을 바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겠냐며 엄마를 설득했습니다. 그렇다고 엄마의 방법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려는 엄마의 노력은 높이 평가할 점이니까요.
지금까지의 정적인 한글 교육 방식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또 다른 놀이를 소개했습니다. 『수수께끼 ㄱㄴㄷ』(비룡소)을 펼치면 질문이 나옵니다. 부엉이가 눈을 부릅뜨며 나뭇잎은 누가 먹느냐고 묻습니다. 스핑크스가 강물은 누가 먹느냐고 묻습니다. 요리사가 국자를 든 채로 ‘씨익’ 웃으며 벼락은 누가 먹느냐고 묻습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오는 물음에 한솔이는 자기가 알고 있는 단어를 끄집어 내 답하려고 열심이었습니다. 생각하느라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아는 단어는 스케치북에 쓰기도 하면서요.

시리즈 그림책 단행본 | 최승호 | 그림 이선주
연령 5~10세 | 출판사 비룡소 | 출간일 2007년 8월 10일 | 정가 10,000원
집중하고 생각하는 한솔이의 모습을 보며 엄마는 놀라워했습니다. 집에서는 한글 공부하면서 어떻게든 후다닥 써 놓고 놀 궁리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집중할 수 있는 아이라는 사실을 처음 안 것처럼 감격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재미있는 그림책을 보여 주면서 창의적으로 한글과 마주하게 하는 것이 한솔이한테 더 잘 맞는 한글 교육 방법이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리고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이기숙 교수가 제안한 글자 찾기 놀이를 알려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글자를 그림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글자 찾기가 재미있는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림책을 펴 놓고 아이가 아는 글자를 찾게 합니다. 누가 더 많이 찾는지 엄마랑 내기를 하면 적당한 경쟁이 되면서 재미가 있습니다. 찾을 때마다 동그라미를 치고 나중에 찾은 개수를 세어 봅니다. ‘우리, 우산, 우비, 우유’처럼 같은 글자가 들어 있는 단어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같은 글자가 어떻게 쓰였는지 알 수 있게 되지요. 그림책에서 주인공 이름을 찾는 놀이도 쉽게 글자를 깨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덧붙여서 의성어․의태어 찾기 놀이, 의성어․의태어를 넣어 짧은 문장 만들기 놀이, OX 퀴즈 대회, 동요 따라 부르기, 낱말을 수집해서 문장 만들기 놀이를 하는 데, 『찾았다!』(길벗어린이), 『요렇게 해봐요』(마루벌), 『반대말』(보림), 「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집」(비룡소), 『최승호․방시혁의 말놀이 동요집』(비룡소), 『낱말 수집가 맥스』(보물창고) 등의 그림책을 활용하는 방법도 한솔이 엄마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말놀이

한글을 깨치는 속도는 아이마다 달라요
한솔이 엄마에게 한글 교육은 체계적인 교육보다 아이의 속도를 따라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른 아이를 기준으로 삼지 말고 한솔이의 속도를 생각하자고 얘기했지요. 이것은 한글 교육에 매진하는 모든 엄마 아빠들이 새겨야 할 점입니다. 유아의 언어 발달은 대체로 비슷한 양상을 보이지만 개인차가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네 집 아이가 몇 살 때 한글을 깨쳤다는 얘기가 내 아이한테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글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느긋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만 한글을 깨치면 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유아 교육자들은 한글 교육을 조급하게 시킬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엄마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한가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한글을 깨쳐야 더 많은 책을 볼 수 있고 세상의 지식을 더 많이 흡수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다른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엄마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라는 전제를 달아 봅니다.

아이가 한글 때문에 힘들어 한다면 이 그림책을 보여 주세요
『고맙습니다, 선생님』(아이세움)이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트리샤는 이제 막 일곱 살이 되었습니다. 글을 읽을 때가 되었지요. 트리샤는 책을 사랑하는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학교 선생님인 엄마는 밤마다 트리샤에게 책을 읽어 주었고, 시골집에 갈 때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벽난로 옆에서 손녀에게 책을 읽어 주었답니다. 트리샤가 일곱 살이 되어서 초등학교 부속 유치원에 다니게 되자 식구들은 트리샤도 글을 읽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트리샤에게 낱말들은 어렵기만 합니다. 글을 읽는 게 무척 힘들게 느껴집니다.
학년이 올라가도 트리샤의 읽기 실력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반 친구들은 트리샤를 향해 벙어리라 놀려 댔지요. 그렇게 트리샤는 고통 속에서 학교생활을 합니다. 5학년이 되자 새 선생님이 왔습니다. 폴커 선생님은 누가 똑똑하건, 누가 최고이건 상관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선생님은 트리샤가 그림을 그릴 때마다 항상 뒤에서 속삭였습니다. “대단한데. 아주 훌륭해. 넌 네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니?” 글자를 못 읽는 트리샤를 한심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놀리는 반 아이들을 혼내 줍니다. 그리고 트리샤가 글자를 익힐 수 있도록 게임을 제안합니다. 수치스러움에 고통스러운 트리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용기를 심어 주지요. 선생님 덕분에 트리샤는 조금씩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서서히 행복을 찾아 갑니다.
30년 후 트리샤는 폴커 선생님을 어느 결혼식장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선생님은 트리샤를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트리샤는 선생님이 몇 년 전에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주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는 선생님께 트리샤는 “그러니까 뭐냐면요, 폴커 선생님. 저는 어린이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폴커 선생님,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트리샤의 이야기는 어린이책을 만드는 패트리샤 폴라코의 실제 이야기랍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글을 깨친 아이가, 벙어리라고 놀림 받던 아이가 어린이책 작가가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맞는 때를 기다려 주세요
저는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한글을 깨쳤습니다. 한글을 깨칠 때까지는 그야말로 암흑기였지요. 받아쓰기는 늘 빵점이었습니다. 앞집에 사는 친구가 늘 백 점을 맞는 바람에 친정 엄마의 분노는 극에 달했지요. 그래서 학교에 다녀온 저를 앉혀 놓고 붓글씨로 ‘가나다’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글자를 크게 적어 주면 눈이 뜨일까 하고요. 다섯 살 때 혼자 한글을 깨친 언니가 저더러 바보라며 놀려 댔습니다. 종종 엄마 옆에서 저를 쥐어박으며 구박하는 바람에 눈물을 꽤 쏟았습니다.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10월에 거짓말처럼 한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행복감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고통스러움에서 해방된 날이니까요. 책 속 글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느꼈던 트리샤의 행복을 저는 잘 압니다. 너무너무 행복해서 흐르는 눈물, 그때 저도 그랬습니다.
한글을 깨치고 나니 모든 게 달라지더군요.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즐거움, 받아쓰기를 백점 맞는 기쁨, 글쓰기가 되는 신기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심리상담사로서, 강사로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생을 바보라고 놀렸던 언니가 이제는 저를 부러워하지요. 친정 엄마도 그때 일을 얘기하며 신기해하십니다. “너 평생 한글 못 깨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다.”면서요.
아이가 한글 깨치는 게 늦다고 걱정하는 엄마들을 만나면 제 어릴 적 이야기를 끄집어 내 패트리샤 폴라코의 이야기와 함께 들려줍니다. 그리고 아이한테 맞는 때가 있으니 기다려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합니다. 덧붙여 한글을 늦게 깨치는 아이일수록 부모의 격려와 지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지요. 폴커 선생님과 같은 역할은 다른 사람이 아닌, 엄마와 아빠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참고 문헌
이차숙, 『유아 언어 교육의 이론과 실제』(학지사, 2005)
이경화 · 이성숙 · 김경화, 『유아 언어 교육』(공동체, 2010)
정남미,『유아 언어 교육』(창지사, 2013)
유민임 · 오성숙,『유아 언어 교육』(양서원, 2013)


d_img4글 : 김은아 (마음문학치료연구소 소장, 행복한그림동화책연구소소장)
대학에서 국어 국문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아동가족상담과 문학치료학을 공부했습니다. 현재 행복한 그림동화책 연구소와 마음문학치료 연구소를 운영하며 대학에서 아동상담과 아동문학, 부모교육 등의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책 기획자, 특별 기고가로서 어린이책의 매력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으로 마음 나눔을 실천하고자 행복한 도서관 만들기 운동과 다문화 가정 그림책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